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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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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연옥에서 걸어나오기

  • 작성일2017-07-14 14:03
  • 조회수859
  • 수상자박O언

<연옥(煉獄)에서 걸어나오기>

“띠리리리링.”

아침 여덟 시의 자명종이 힘차게 울린다. 그럴 때면 내 손도 자명종 버튼을 눌러 꺼버린다. 다시 고요한 잠 속으로 빠졌다가 눈을 뜨니 아홉 시나 열 시. 어떨 때는, 창피하지만, 열두 시에 기상한 적도 있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 운동도 하면서 건강을 만들어가자고 다짐하지만 늘 아침이면 이렇게 늦고 만다. 기자 생활 당시 편집국장을 했던 선배가 폐암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린 결론은 운동을 하자였다. 그렇잖아도 아랫배가 불룩하게 나온 전형적인 중년 남자의 표본을 따라가고 있는 것에 내심 불만스럽기도 했던 터였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다. 일찍 일어나는 것, 그것도 남들은 다 출근하기 바쁜 여덟 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2010년 나는 한 국립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조현병으로 대인관계의 어려움, 공황장애 등이 몰려오면서 갈팡질팡했던 10년의 시절이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 나는 기자로, 장사꾼으로, 마지막에는 무직(無職)의 삶을 살았다. 내가 모든 것을 손 놓고 포기하고 있을 때 가족의 결정으로 입원한 것이다.

그렇게 병동에서 6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지인(知人)의 소개로 주거 시설에서 생활하게 됐다. 4호선 수유역에 내려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야 하는 곳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늘 정신장애인의 거주 공간은 왜 이렇게 멀리, 공동체 밖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그 주거시설에서 다시 사람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많이 퇴행해 있었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기피증이 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은 내게 삶의 기술을 다시 배우고, 대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인생 훈련소’ 같았다.

시설장님과 상의를 해서 나는 도서관을 다니기로 했다. 낮병원도 있었지만 나는 책을 읽고 싶었고 글을 쓰고 싶었다. 3년을 그렇게 보냈다. 나는 조금씩 소설 습작을 시작했고 내가 살아온 삶의 과정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훈련도 함께 했다. 그곳을 떠난 뒤 나는 다시 구로구의 한 시설로 옮겼다. 어느 날 시설장님이 나를 불렀다. “정신장애인 문학 팀이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느냐”고.

문학반 모임이 있는 곳은 2호선 봉천역 근처 언덕길에 있었다. 십여 명이 모여서 한 주제를 놓고 습작을 해서 발표하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회원은 모두 정신장애인들이었다. 그곳에 다니면서 나는 백일장이 솔찮게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들과 어울려 백일장이 있는 날이면 함께 가서 글을 쓰기도 했다. 문학반에 다니는 그 3년 동안 나는 십여 군데에서 수필로, 시로, 소설로 상을 받았다. 40대였다.

돌이켜 보면 20대의 나는 문학을 거부했다. 가난한 삶이 뻔히 보이는 그런 길로 들어서고 싶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도 몇 번의 대학 문학상을 탔지만 나는 글을 피했다. 그리고 달아나듯이 브라질로 유학을 갔다. 4년의 유학 시절 동안 나는 이러저러한 생의 파편에 괴로워했고, 그 사회에 오래 살다간 내가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은 극도의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나는 참담하게 패배한 군인처럼 귀국했다. 한국의 정신과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았지만 나는 엘리자베트 퀴블러로스가 말한 ‘부정’ 혹은 ‘부인’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스위스 여성 정신의학자인 그는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눈다. 암 선고를 받은 이는 ‘내가 그럴 리 없다’는 첫 번째 부인의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암이 확정되면 ‘왜 내가?’라는 의아함과 분노를 함께 표출한다. 그리고 신(神)과 타협을 한다. ‘언제까지만 살게 해 달라고.’ 그러나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깊은 우울에 빠지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상에 죽음이 있다는 이치를 깨닫고 이를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정신적 질환에 대한 부인, 분노, 우울, 타협, 수용의 과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삶에서 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내가 당한 고통을 언어로 표출하고 이를 타자와 공유하고 함께 치유되는 길을 모색하는 그런 삶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구로의 시설에 살 때 다시 시설장님이 의견을 제시했다. “청약통장을 만들자”고. 월 5만 원씩 2년 간 납입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임대주택 대상자가 됐다는 공문이 왔다. 그리고 나는 인천의 한 곳에 있는 5층짜리 빌라에 입주할 자격을 얻게 됐다. 맨 꼭대기 5층이어서 오르내리면 숨이 좀 헉헉거리지만 내겐 나만의 공간, 방이 두 개에 거실이 있는 과분한 곳에 살게 된 것이다. 나는 3년의 시설 생활을 마친 후 인천의 집으로 입주했다.

다른 일도 생겼다. 정신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신문을 만들자는 요청이 들어왔다. 기자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그곳에서 데스크로 활동을 하게 됐다. 주중에 한 번 모여 기사 쓰기와 취재 방법 등을 공유하고 공부하는 일을 지난 2년 간 해오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1월에 창간하게 되는데 삶이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삶이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게 내가 살면서 깨달은 작은 삶의 정의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정신보건법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런 저런 모임에 참가하면서 이 법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리고 작년에 정신보건복지법이 제정됐고 올 5월 말에 시행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정신장애인들이 모여 만든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이 있는 것도 안 것은 기자 스터디 모임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러고 보면 치유란 내가 몇 월 며칠에 우연하게 낫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흐름에 몸을 던지고 그 모든 슬픔과 시련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정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치유되는 자’를 ‘자신의 삶의 사명으로 돌아오는 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정신장애인은 정신의 연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다. 인간의 이성(理性)이 이 세계를 해석하고 규정하는 척도라면 그 이성을 갖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정신장애인은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조현병 환자에 의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공동체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적 갈등과 분노를 전이시킨다. 그리고 집단적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정신장애인을 한낱 비루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사회적 청정성(cleaness)에 대한 강박적인 사유다. 일탈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은 깨끗해야 할 공동체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비정신장애인들이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이와 같다.

2013년 대검찰청 범죄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의 범죄자 128만여 명 중,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0.4%로,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의 범죄 발생비율 42.8%보다 압도적으로 적었다.

이 같은 논리적 수치가 있지만 비정신장애인들은 여전히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왜 그럴까? 나는 매스컴이야말로 정신장애인을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로 만드는 첫 번째 이유로 생각한다. 이들이 조작하는 정신장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무지는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회적 정화를 위해 정신장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언론의 프레임은 정신장애인을 늘 방치된 위험한 인물들로 묘사하고 있다. 사회적 시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원에 입소한 정신장애인들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어떤 이는 30년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경우도 있다. 정신보건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국에서 정신병원 병원 병상은 2천여 석에 불과했다. 그것이 10만여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정신병원의 자본과 관련한 기형적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현상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선진국들이 197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탈시설화를 추진해 온 것에 비하면 우리는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정신보건복지법이 5월 시행을 앞두고 의료계에서는 정신장애인들이 아무런 대책 없이 사회로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법의 재개정을 요청했다고 한다. 진정으로 환자들을 생각했다면 의료계는 정신장애인들이 병원에서 사회로 나올 때 왜 그 이후의 대안으로 사회적 인프라를 만드는 데 노력을 먼저 기울이지 않았나 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난 일 월, 나는 일본 ‘베델의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인구 1만5천여 명의 조그만 어촌 마을인 우라카와에 있는 이 모임은 그야말로 정신장애인들이 사회적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면서 치유를 전망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기피하는 ‘환청’에 대해 ‘환청 콘테스트’를 열 정도로 정신장애인의 근본적인 슬픔을 위로하는 듯했다. 이들은 환청과 망상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전 회원이 정기적으로 토론한다. 예컨대 사과를 싫어하는 사람은 사과가 점심으로 나오면 정중하게 ‘이걸 먹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겠습니다’라고 말하자는 의견의 일치가 나왔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속에서부터 두려움과 거부감 때문에 ‘폭발’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베델의집을 모델로 자립 모임을 만들고 당사자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 모델이 있기 때문에 우리 정신장애인 당사자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 병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나와서 이런 모임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발견해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감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인간됨을 대화와 소통으로 찾아나가자는 얘기다. 적어도 정신병원에서 30년이나 환자로 살아가면서 사회적 맥락과 의사소통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허깨비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명백한 침해다.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40대 중반의 남성이고 이성애자고 조현병 당사자이다. 만약 내가 병원에 10년 넘게 있었다거나, 혹은 요양원 같은 곳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과 감금의 생활을 했다면 나는 어쩌면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른다. 주는 약만 먹고,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박탈당하고, 노예처럼 의료 시스템 안에서 서서히 그렇게 늙어가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이렇게 되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성공적으로’살 게 되는 경우를 두고 ‘생존자’라고 말했다. 원치 않는 강제입원과 이해관계에 따른 장기입원의 모순,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엄격하고 불공정한 정신병원과 요양원의 감금 시스템을 우리는 바꿔나가야 한다.

다행히 정신건강복지법은 그 목표의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 존중과 정신과 전문의 일 인이 아닌 두 명의 크로스체크로 입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지난 시절보다는 정신장애인의 인권에 기반을 둔 사회적 정책과 프로젝트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1960년대 서구를 휩쓴 반(反) 정신의학 운동은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병원 권력을 와해시키려는 전면적인 반(反) 정신병원 테제였다. 그들은 정신장애인이 약을 먹을 필요가 없으며 공동체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갖고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은 약물 복용도 치유의 한 방편임을 무시했거나 이에 대해 무지했을 것이다. 환청을 듣고 있는 이에게 약을 먹으면 회복될 수 있는데도 약물 복용을 거부하게 한다면 이것은 본말의 전도다. 환청을 듣고 길거리에서 중얼거리는 이에게 자율적으로 삶을 살라고 요구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약물 신봉자는 아니지만 정신적 치유에 어느 정도는 약물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악용해 약물 만능주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최소 약물과 당사자의 자기결정권 존중.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다.

정신건강복지법이 곧 시행된다. 비록 온전히 흡족하지는 않지만 이것 또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할 시대의 한 의무 아닐까.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편견이 줄어든 세계에 살기 위해 먼저 치유된 정신장애인들이 더 나은 법의 법제화, 공동체의 인프라 구축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깨어있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정치적 주체 운동이 없다면 정신장애인 당사자는 여전히 저 높고 깊은 병원에서 나올 수 없고, 의사의 편의주의적 치료법인 약물 만능주의에 빠져 우리의 존엄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내일 아침 여덟 시면 어김없이 자명종이 울릴 것이다.

“띠리리리링.”

나는 그 자명종을 손으로 끄고, 또 한 시간 가량의 꿈 속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전날 먹은 약물 때문에 못 일어나는 듯이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어쨌든 일찍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늘 같은 패턴이다. 운동도 해야 하는데, 책도 더 열심히 읽어야 하는데 게으름이 나를 주저앉게 만들곤 한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고 감사하다. 언젠가 정신장애인 동료가 내게 말했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그는 깨달은 자일까? 나는 그가 깨달음에 가까이 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신의 연옥(煉獄)에서 걸어나오며 삶의 진실을 포착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도 그러고 싶다. 꽃잎 하나 지는 모습을 보면서 생에 대해 무한하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고 싶다. 혹은 들에 핀 들꽃에서도 신의 은총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더 나은 정신장애인들의 삶을 위해서 먼저 치유된 내가 동료들과 더불어 정치적 주체를 구성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길은 멀지만 나는 행복하다. 인간은 희망이 있는 한 쉽게 삶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 희망은 내게 정신장애인의 인간해방이다. 그러기 위해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해야 겠다. 나와의 이 약속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지킬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일도 자명종은 울릴 것이다.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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